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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05

수레 끄는 노인 이른 새벽녘 차들이 지나가는 도로 위 폐지를 가득 싣고 수레를 힘겹게 끌고 가는 노인의 굽어진 어깨는 시내버스 차창 사이로 위태롭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접어진 골판지 상자들은 퍼즐처럼 올려지는 시간만큼 고물상 저울은 올라간다. 폐지의 무게만큼 쌓였으면 하는 한 끼의 노고에도 봄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한 끼의 고단함에도 질서 정연하게 쌓여있는 폐골판지를 보면 삶을 허투루 살 수가 없다. 한 끼의 식사를 위해 찬비를 맞으며 오늘도 수레에 몸을 싣고 대로를 가로지른다. 첫차는 기사만이 텅 빈 차를 환한 빛으로 달린다. 나는 반대편을 가로지르며 이어폰을 끼고 생상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있다. 2024. 3. 11.
남교오거리 시공간의 분할에서 오는 거리감은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이어진다. 거리의 시간은 생산의 년도 만큼 변화를 이어간다. 유행을 따라 간판의 모습도 직종도 달라진다. 네온사인 간판은 이제 사라지고 식어간다. 학생들의 수만큼 활발했던 스포츠 매장도 이제는 내리막길이다. 그러나 변함없이 이어가는 열쇠와 도장은 비밀의 금고처럼 그대로다. 겨울에도 꽃이 지지 않은 세상에 꽃집은 변함없이 이어간다. 각자도생의 세상에서 빌딩 숲에 가려진 뒷골목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다. 2024. 3. 6.
쌍계사 가는 길 쌍계사 청학루를 지나 금당을 마주하고 툇마루에 앉아 뒤뜰을 바라보았다. 동백숲에 백매가 피고 있다. 벌들이 몰려들고 새들도 날아든다. 누군가 탑돌이를 하나 마룻바닥이 삐그덕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일정하다. 한 바퀴도 아니고 몇 바퀴 채 돌고 있는지 소리는 이어졌다. 소원성취하길. 금당에는 불상이 아닌 석탑이 들어있다. 국사암으로 향했다. 1,200년을 이어 살고 있는 느티나무를 보아야 했다. 네 마리의 용이 승천하듯 자라고 있었다. 가지 일부가 부러져 있지만 사방으로 뻗치고 있다. 요즘 들어 나무에 눈이 돌아간다. 기본이 500년을 버티고 살아온 생명력에 그저 100년도 못 미치는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한쪽은 바람에 갈라지고 썩어 들어도 다른 한쪽은 새순을 튀어 태양을 향해.. 2024. 2. 16.
삼일정미소 담양 추월산 가는 길 삼일정미소가 보였다. 정미소 건물들은 비슷하다. 뼈대 위 양철로 지붕과 벽을 막았다. 바람이 불면 후드득 날아갈 것 같은 허술한 모습이다. 가장 단순한 건축물이다. 그것도 이삼 층 높이로 잘도 만들었다. 예전에 벼를 수확하면 하루종일 볕에 말려 정미소에서 도정을 하였다. 거대한 나무 통로가 수직과 수평으로 이어지고 각종 풀리와 벨트가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양철지붕 틈으로 스며드는 빛으로 가루들이 뿌옇게 피어오르고 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움직임과 동력이 전달되는 기계 소리 그 광경이 싫지 않았다. 온몸으로 낙하한 가루들은 눅눅하고 비릿한 냄새로 쌓여있다. 지금은 현대화되어 나무로 만든 통로와 각종 풀리와 벨트가 사라지고 일체화된 도정 기계가 놓여있다. 2023. 12. 20.